정보/법과 역사

서울 문화권의 역사, 한강문화권, 서울의 발전 2

--J-- 2022. 11. 2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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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근대의 한강 문화권

흥선대원군은 당시 즉위 후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려고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주조하여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이후 프랑스, 미국과 분쟁을 겪으며 척화비를 올렸으나 최익현의 흥선대원군 탄핵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퇴진하였다. 고종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1882년 청, 일본, 미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이후 을미사변이 있었고 흥선대원군은 아관파천하였다. 이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 교육, 산업, 전기, 전차, 철도 등 근대 문명을 활발히 도입했으나 외국의 간섭이 심했다. 이후 근대적 자강 체제의 수립을 위해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설립하였고 서울 종로에서 대소 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관민공동회를 설립했다. 더불어 민중도 애국계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다. 현재 서울 사직터널 밖 독립공원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본과 한일의정서, 1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정미 7 조약처럼 불합리한 조약이 계속되었고 이에 반발한 을사 의병과 정미의병이 일어난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함으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1910년 ‘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피탈되었고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가 시작되었다.

6) 일제강점기의 한강 문화권

1910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당해 9월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고 1899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철도 개통은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 함경선 순으로 완료되었다. 일제의 철도 부설은 내륙의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탄압 속에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미주 한인사회까지 퍼져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계기가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애국선열들이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그중 만주 지린성에서 창설한 의열단의 단원 중 김익상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고,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근대의 한강 지역은 국권을 되찾아 근대화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이자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새겨진 지역이다.

7) 광복 이후의 한강 문화권

광복 후 6.25 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당시 남한은 남쪽 끝으로 밀려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정했을 당시, 미국의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치며 서울을 탈환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과 38선 이남을 회복하였고 현재의 남한과 북한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후 남한은 한강 지역에서 발전하게 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이후 민주사회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 크고 작은 문제 속에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나라 경제 발전에 힘썼다. 박정희 정부 이후 큰 경제 성장을 이루며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여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3. 한강 문화권의 현재와 미래

한반도 역사적으로 한강 지역은 나라의 중심이 되어 나라의 발전을 이끄는 지역이었다. 서울은 현재도 인구가 몰리고 다른 도시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서울특별시는 서울이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되기 위해 국제 금융 및 비즈니스 산업, 정보통신, 디지털 콘텐츠, 패션산업, 바이오산업을 5대 전략산업으로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의 서울이 동북아시아를 넘어서 전 세계적인 도시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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